[일요서울/외고] 능력주의와 ‘국뽕’ 그리고 평창
2018-02-14 12:22
(원문링크)
- 국가주의를 벗어나 작동하기 시작한 능력주의
- 국가에 대한 자긍심, 사라진 것이 아닌 변화
평창올림픽이 드디어 개막되었다. 화려한 개막식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30여년을 더 달려온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풍경과 꿈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는 느낌이다.
이번 올림픽에는 여러 논란이 있었는데, 결을 따라 키워드를 정리한다면 능력주의와 ‘국뽕’(국가와 히로뽕(philopon)의 합성어. 국수주의·민족주의가 심하며 타민족에 배타적이고 자국만이 최고라고 여기는 행위나 사람)이 아닐까 싶다. 여성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추진·실행한 정부는 예상치 못한 반발에 당황했다.
청년들은 북한 선수 몇 명이 엔트리에 승선하는 상황을 공정성이 훼손되는 것으로 인지했다. 과거 운동선수들이 국가 시책에 의한 개인의 희생을 묵묵히 감내했다면, 선수들의 불만 섞인 인터뷰가 외부에 흘러 나왔다는 점 역시 바뀐 세태였다.
능력주의는 그간 한국의 놀라운 발전을 지탱한 원동력이었다. 능력주의 자체가 국가주의에 의해 육성되고 장려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능력주의는 국가를 벗어나 작동할 정도로 자율성을 획득했다. 이는 이미 2014년 러시아 소치올림픽에서 빅토르안(한국 이름 안현수) 선수의 논란으로도 나타났다.
‘빅토르안 성공신화’가
먼저 보여줬던 것
러시아 귀화를 선택한 빅토르안 개인의 선택과 별개로, 사람들의 그를 응원하고 심지어 빙상연맹을 비판하는 세태는 새로웠다. 그는 시상식에서 누구보다도 씩씩하게 러시아 국가를 불렀다.
이는 능력주의를 육성했던 국가주의가 오히려 능력주의를 위한 도구로 전복된 풍경이었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풍토에서 자라난 한국의 운동선수는 국적을 바꿔서도 국가의 영광을 지나치게 강조한 러시아의 올림픽에 수월하게 융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이를 비난하기는커녕 거기에서 모종의 성공신화를 보았다.
국가주의는 약화된 것일까. 한국 사회 시민들은 예전처럼 메달 숫자와 순위에 집착하지 않고 좀 더 스포츠경기를 즐기면서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국가 주도의 성과주의에 더 이상 사람들이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국가주의는 약화되었다기보다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여성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논란으로 돌아와 보자. 2018년의 한국인들은 다만 국가와 개인을 대립항에 놓고 전자를 위한 후자의 희생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게 된 것일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국가’에 과거처럼 ‘민족’이란 범주가 결정적이지 않게 된 것이 핵심이었다.
2018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북한은 민족이란 범주 하에서 우리와 함께 묶이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득한 이국이었고, 함께 묶이기엔 촌스럽거나 쪽팔리는 대상이었다. 차라리 빅토르안이 자연스러웠듯, 동계올림픽 성과를 위해 귀화한 이들이 그들에겐 ‘한국인’에 알맞았다. 개막식에서 22개국 출신 부모의 다문화가정 자녀 75명으로 구성된 레인보우합창단이 애국가를 부르는 풍경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는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었다.
2002년의 ‘대한민국’,
그 후 16년
이는 2002년 저 월드컵의 길거리응원에서부터 배태되고 진전된 욕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치우 깃발이 등장하는 등 환상적 민족주의의 열망이 작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을 외쳤을 때 그것은 내 삶이 구체적으로 기거하는 현실의 공동체에 대한 뜨거운 자부심과 승인의 감정이었다.
요즘 인터넷용어로 표현한다면 국가주의라기보다는 ‘국뽕’이었다. 그들은 국가와 개인을 대립시키고 다만 전자를 위한 후자의 희생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국가를 열망하고, 국가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일 경우 자랑스러워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 후로도 16년이 지났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제1세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국제적 이슈가 생길 때 기성세대는 제3세계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생각하지만 청년층은 미국이나 유럽 시민들에게 감정이입하는 경우도 왕왕 생겼다.
유튜브에선 서양인들이 케이팝에 맞춰 춤을 춘 영상이 심심찮게 올라오고 한국 음식 먹방 역시 모종의 장르가 되었다. 이제는 기성 방송매체들 역시 그러한 포맷을 흡수하여 인기 프로그램을 만든다.
NBC 아나운서가 일본 선수단 입장 당시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면서 한국인들이 게시판에 가서 극렬 항의하고 아나운서가 결국 교체되는 풍경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여기에서 항의하는 시민들은 단일팀 논란에 분개했던 그 청년들과 다른 이들이 아니다.
한국인들의 분개가 얼마나 적절했는지는 따로 따져볼 구석이 있지만, 여기서 핵심은 그들에게서 국가란 범주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자긍심을 느끼는 패턴이 관측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더 자연스럽고, 과거 한국인들이 기를 쓰며 선진국들을 모방하면서 부러워했던 그 어떤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경제적 풍요와 민주주의가 만족스럽다면 4년 만에 한 번 있는 제전에서 메달경쟁에 집착할 이유는 줄어든다. 분투하는 선수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훨씬 알맞다. 어찌 보면 가진 자의 여유다.
불과 백 년 전 근대에 적응하지 못해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다. KTX보다 빠른 변화의 속도는 그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 군상들을 만들어낸다. 이 능력주의와 ‘국뽕’의 사이, 아니 그 너머를 걸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민족’이나 ‘통일’ 같은 단어를 과도하게 부여잡고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더 이상 환호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다소 기괴하게 받아들여지는 북한 응원단의 응원에 겁을 집어먹고 ‘적화통일’ 씩이나 염려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들이 모두 동시대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다.
그러나 LED, 홀로그램, 인간과 드론의 마스게임, 아낌없이 때려 박은 화약으로 가득 찬 개막식을 보면서 북한 선수단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오히려 그게 더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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